그 차, 제 차예요...2026

그 차, 제 차예요
1부 — 검은 세단 앞의 청년
서울의 저녁은 유리창에 먼저 내려앉았다.
도심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강남의 한 고급 자동차 전시장 안은 바깥보다 훨씬 조용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드러운 조명은 옅은 회색 석재 바닥 위로 길게 번졌고, 짙은 코발트빛 간접 조명이 검은 유리와 금속 표면을 차갑게 감싸고 있었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검은색 대형 세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로고는 보이지 않았다.
번호판도 없었다.
하지만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비싼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장이 거울처럼 주변의 조명을 반사했고, 길게 뻗은 차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준호는 그 차 앞에 서 있었다.
스물한 살.
검은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빛이 바랜 짙은 회색 티셔츠 위에는 오래 입은 올리브색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바지도 평범했다.
운동화는 깨끗했지만 오래 신어 가장자리가 희끗하게 닳아 있었다.
손목시계도 없었다.
반지도 없었다.
가방도 없었다.
누군가 그를 처음 본다면 근처 대학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친구를 기다리다 호기심에 전시장에 들어온 청년.
준호는 천천히 차의 앞부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보닛 가장자리를 쓸었다.
그 행동에는 욕심도 과장된 감탄도 없었다.
그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장면에 흠집이 있는지.
마감이 괜찮은지.
혹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김서연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서연은 친구 세 명과 함께 전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
네 사람 모두 저녁 약속을 앞두고 잠시 들른 듯 세련되게 차려입고 있었다.
서연은 짙은 와인색 원피스 위에 크림색 짧은 재킷을 걸쳤다.
긴 갈색 머리는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었고, 귀에는 작은 은색 귀걸이가 빛났다.
친구 중 한 명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다른 차를 보며 가격과 옵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연의 시선이 준호에게 멈췄다.
처음에는 그저 잠깐이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달라졌다.
그녀의 눈이 준호의 낡은 운동화에서 시작해 바지, 셔츠, 그리고 검은 세단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친구 한 명이 물었다.
“왜?”
서연은 작게 웃었다.
“아니. 그냥.”
친구들도 준호 쪽을 보았다.
누군가 입꼬리를 올렸다.
준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서연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이 차를 살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은 한 번 결론을 내리면, 그 결론을 확인할 증거만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서연도 그랬다.
2부 —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준호는 조수석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손잡이를 잡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창문과 도어 사이의 마감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조금 뒤에 서 있었다.
서연은 먼저 차를 보고, 다시 준호를 보았다.
“저기요.”
준호가 조용히 돌아섰다.
“네?”
서연은 검은 세단을 가볍게 가리켰다.
“그 차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준호는 잠깐 멈췄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차에서 떨어졌다.
서연은 그 반응을 보고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차는 조금만 흠집 나도 수리비가 엄청 비싸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보았다.
“그냥 확인해 보고 있었어요.”
목소리는 작고 차분했다.
서연이 웃었다.
“확인이요?”
“네.”
“뭘 확인하는데요?”
준호는 대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떻게 설명해도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았다.
그 침묵이 서연에게는 다른 의미로 보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었다.
“당신이 살 수 있는 차도 아니잖아요.”
뒤에서 친구 한 명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누구도 서연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친구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준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당황해서였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에게 오해받은 적은 있었다.
평소 옷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싼 것을 일부러 찾아 입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여러 번 좋은 옷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준호는 대부분 거절했다.
옷은 편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싼 차가 좋기는 했지만, 그것을 타는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옷을 보고 공개적으로 경제적 형편까지 판단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준호는 짧게 말했다.
“그냥 보고 있었어요.”
서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꿈은 자유니까요.”
친구 한 명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준호는 들었다.
그는 잠시 친구들 쪽을 보았다.
그 뒤 다시 서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해야 할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그 침묵을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다.
준호는 그저 더 이상 설명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3부 — 한준호가 전시장에 온 이유
준호가 그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차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자신의 차였다.
몇 주 전부터 전시장에 맡겨 두었던 차량을 확인하러 왔다.
큰 고장은 아니었다.
몇 가지 점검과 내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그리고 작은 외관 검수가 필요했다.
준호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것을 과시하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았다.
차를 받은 날에도 SNS에 사진 한 장 올리지 않았다.
친구 몇 명만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히 타고 다녀?”
친구가 물었을 때 준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차가 나 대신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날 저녁, 준호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갈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같은 건물 안쪽의 비공개 라운지에서 몇 사람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준호는 회의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나와 자신의 차를 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 있었다.
준호는 차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서연과 친구들은 아직 그 근처에 있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학생인가?”
“아르바이트하는 것 같지 않아?”
“근데 왜 여기 왔지?”
“그냥 구경 왔나 보지.”
서연의 목소리가 가장 또렷했다.
“요즘 이런 데 와서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 많잖아.”
준호는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는 원래 낯선 사람과 싸우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이런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것은 더 싫었다.
그때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 위로 갔다.
주머니 안에는 작은 물건 하나가 있었다.
은색 스마트키.
오늘 차를 확인하고 가져가기 위해 직원에게서 받아 둔 키였다.
준호는 잠깐 망설였다.
키를 보여 주면 모든 상황은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이 상대를 이기기 위해 비싼 물건을 증명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다시 내렸다.
아직은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서연은 멈추지 않았다.
“저기요.”
준호가 다시 돌아봤다.
“네.”
“사진 찍으려면 그냥 밖에서 찍는 게 낫지 않아요?”
준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사진이요?”
“요즘 SNS 때문에 이런 데 오는 사람 많잖아요.”
친구 중 한 명이 서연의 팔을 건드렸다.
“야, 이제 그만해.”
처음으로 말리는 목소리였다.
서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그냥 말해 주는 건데.”
준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는 대신 묻고 싶어졌다.
왜 저 사람은 자신을 이렇게 확신하고 있을까.
옷 때문인가.
신발 때문인가.
나이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 때문인가.
준호는 말했다.
“제가 여기 있으면 불편하세요?”
서연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잠깐 멈췄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그럼 괜찮습니다.”
준호는 다시 차를 바라봤다.
그 한마디가 서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녀는 준호가 자신 앞에서 주눅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조용하면서도 이상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4부 — 한 번의 불빛
서연은 다시 말했다.
“차를 좋아하는 건 이해해요.”
준호가 듣고 있었다.
“근데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죠.”
그 순간 준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서연의 친구들이 그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차 키를 잡았다.
은색 스마트키가 주머니 밖으로 나왔다.
작고 단순했다.
눈에 띄는 로고는 없었다.
서연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준호는 손가락으로 버튼 하나를 눌렀다.
딸깍.
아주 작은 소리.
다음 순간.
뒤에 있던 검은 세단의 전조등이 한 번 부드럽게 깜빡였다.
짧았다.
화려하지 않았다.
경적도 울리지 않았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불빛으로 충분했다.
친구들의 웃음이 멈췄다.
서연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준호의 손에 있는 키를 보았다.
다시 차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준호를 보았다.
누군가 아주 작게 말했다.
“어?”
준호는 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연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려고 했다.
“그 키…”
준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네.”
“직원한테 받은 거예요?”
준호는 잠시 생각했다.
“비슷하죠.”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차를 점검받는 동안 직원에게 맡겼고 조금 전 돌려받았다.
하지만 서연은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시승하려고요?”
준호는 아주 작게 웃었다.
“아니요.”
“그럼…”
준호는 차를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이 차, 제 차예요.”
침묵.
서연은 그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방금 한 말들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 수 있는 차도 아니잖아요.
꿈은 자유니까요.
그 모든 문장이 몇 초 만에 자신에게 돌아온 것 같았다.
친구 한 명이 시선을 피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친구는 아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남자 친구는 입술을 다물었다.
서연만이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설마…”
그녀가 말했다.
“이 매장도 당신 거라고 하려고요?”
말이 끝난 순간, 그녀 자신도 조금 후회했다.
이번에는 친구 누구도 웃지 않았다.
준호는 오히려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요.”
“그럼요?”
“차만 제 차예요.”
그 대답은 이상하리만큼 평범했다.
자랑도 없었다.
비꼼도 없었다.
그래서 서연은 더 불편해졌다.
5부 — 믿고 싶지 않은 이유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할 때가 있다.
서연이 그랬다.
그녀는 준호의 차 키를 봤다.
차가 반응하는 것도 봤다.
논리적으로는 이미 답이 나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계속 다른 가능성을 찾았다.
빌린 차일 수도 있다.
부모님 차일 수도 있다.
직원에게 받은 키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연일 수도 있다.
물론 마지막 가능성은 말도 안 됐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판단을 지키기 위해 때때로 불가능한 설명까지 붙잡는다.
“부모님 차 아니에요?”
서연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명의가 궁금하신 거예요?”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친구 한 명이 다시 팔을 잡았다.
“서연아, 그만하자.”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확실했다.
“됐어.”
서연은 팔을 빼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준호가 말했다.
“괜찮아요.”
그 한마디 때문에 서연은 더 작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가 화라도 냈다면 싸울 이유가 생겼을 것이다.
“사람을 왜 그렇게 봐요?”
“옷이 낡았으면 차가 없다는 법 있어요?”
그런 식으로 따졌다면 서연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 키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때 전시장 안쪽에서 한 남자가 그들을 바라봤다.
전시장 관리자였다.
마흔다섯 정도.
짙은 남색 정장.
회색 셔츠.
버건디색 넥타이.
그는 몇 분 전부터 내부 공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준호를 발견했다.
관리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놀란 것도 아니었다.
긴장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는 사람을 발견한 전문가의 표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서연도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순간 안도했다.
이제 직원이 오네.
그녀는 생각했다.
아마 저 사람한테 설명하겠지.
어쩌면 준호가 차량에 손을 댄 것에 대해 직원이 주의를 줄 수도 있었다.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친구들도 관리자를 바라봤다.
준호는 여전히 차 키를 들고 있었다.
관리자가 가까워졌다.
서연의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입을 열려고 했다.
“저기…”
하지만 관리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연을 지나쳤다.
그리고 준호 바로 앞에서 멈췄다.
“한준호 님.”
그 순간.
전시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6부 — “아버님 회의가 끝나셨습니다”
준호가 관리자 쪽을 돌아봤다.
표정에는 놀람이 없었다.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아, 끝났어요?”
관리자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과장된 인사도 아니었다.
허리를 깊게 숙이지도 않았다.
그저 고급 서비스 공간에서 고객에게 보여 주는 정중한 태도였다.
“네. 아버님 회의가 끝나셨습니다.”
준호가 시간을 확인하려다 손목에 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조금 전에 마무리됐습니다.”
관리자는 검은 세단을 바라보았다.
“차량 상태는 확인하셨습니까?”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추가로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셨고요?”
“없어요.”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관리자가 준호를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준호가 이곳에서 단순히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차가 정말 그의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전시장 안쪽에서 어떤 사람들과 비공개 회의를 하고 있었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관리자는 서연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업무대로 준호에게 말했다.
“라운지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요.”
그리고 서연 쪽을 바라봤다.
서연은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친구들도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웃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준호의 눈은 차분했다.
승리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잠깐 그녀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목소리가 작아졌다.
“당신 차였어요?”
준호는 손바닥에 은색 키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네.”
그게 전부였다.
7부 — 가장 듣기 싫은 말
서연은 “미안해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자신이 먼저 판단했다.
자신이 먼저 비꼬았다.
자신이 틀렸다.
그러면 사과하면 된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준호는 기다리지 않았다.
관리자가 안쪽 라운지를 향해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준호는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다가 잠깐 멈췄다.
서연은 자신에게 뭔가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아마 그런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더 차가운 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친구들 쪽을 보고 말했다.
“차 근처 조심하세요. 바닥이 조금 미끄러워요.”
그리고 다시 걸었다.
서연은 어이가 없어서 그 뒷모습만 바라봤다.
친구 중 한 명이 아주 작게 말했다.
“야…”
서연은 반응하지 않았다.
“저 사람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하네.”
그 말이 오히려 가장 아팠다.
화도 내지 않았다.
비꼬지도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척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한 행동을 그대로 두고 갔다.
서연은 차를 바라봤다.
검은 세단은 처음부터 같은 자리에 있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도 그대로였다.
준호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낡은 운동화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그것만 바뀌었다.
그런데 몇 분 전과 지금, 그녀가 준호를 보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서연은 그 사실이 불편했다.
왜?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차가 그의 것이 아니었다면 내가 한 말은 괜찮았던 걸까?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8부 — 준호의 아버지
준호는 관리자와 함께 안쪽 라운지로 걸어갔다.
유리문 너머에는 조용한 응접 공간이 있었다.
몇 명의 중년 남성이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준호를 보았다.
“왔어?”
준호의 아버지였다.
준호가 다가갔다.
“네.”
“차 봤어?”
“봤어요.”
“어때?”
“괜찮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옷을 한 번 바라봤다.
“너 오늘도 그렇게 입고 왔냐?”
준호가 웃었다.
“왜요?”
“그냥.”
“편한데.”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네 엄마가 보면 또 뭐라고 하겠다.”
관리자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바깥 전시장 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었어?”
준호는 잠깐 망설였다.
“아니요.”
“아까 밖이 좀 조용해진 것 같던데.”
“그냥 어떤 분이 차 만지면 안 된다고 해서요.”
아버지가 웃었다.
“그래서?”
“제 차라고 했죠.”
“끝?”
“네.”
아버지는 준호를 잠시 바라봤다.
“화 안 났어?”
준호는 생각했다.
솔직히 조금은 불편했다.
특히 친구들 앞에서 웃음을 들었을 때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화를 내야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었다.
“좀 당황하긴 했어요.”
아버지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뭘 갖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너를 낮게 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준호가 아버지를 봤다.
“그게 괜찮다는 뜻이에요?”
“아니.”
아버지는 바로 대답했다.
“그 사람이 잘못한 거지.”
잠시 침묵.
“근데 네가 가진 걸 보여 줘서 그 사람을 이겼다고 생각하면, 너도 결국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거야.”
준호는 그 말을 들었다.
“차가 네 거라서 네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건 아니잖아.”
“네.”
“그럼 차가 네 것이 아니었어도 그 사람이 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됐던 거고.”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은 단순했다.
그러나 정확했다.
9부 — 서연이 돌아가지 못한 이유
서연의 친구들은 이제 전시장을 나가자고 했다.
“우리 예약 시간 늦겠어.”
“가자.”
하지만 서연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검은 세단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준호에게 던졌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당신이 살 수 있는 차도 아니잖아요.
그 문장은 이제 이상하게 들렸다.
차를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해도 되는 말이었나?
만약 준호가 정말 돈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사과하지 않았을까?
친구 중 남자가 말했다.
“서연아.”
“응.”
“너 아까 좀 심했어.”
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너도 웃었잖아.”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맞아.”
다른 여자 친구가 말했다.
“우리도 그랬어.”
잠시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연은 친구들을 탓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 그냥…”
그녀가 말했다.
“차에 흠집 낼까 봐 그런 거였어.”
친구가 물었다.
“진짜?”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준호의 옷이 낡아 보여서.
운동화가 오래돼 보여서.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보여서.
그래서 자신이 그를 판단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영상 안 찍었어.”
서연이 그녀를 봤다.
“뭐?”
“아까부터 폰 들고 있어서 혹시 찍었다고 생각할까 봐.”
“그래.”
“근데… 찍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서연은 말없이 유리문 안쪽을 바라봤다.
준호가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여전히 같은 옷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 옷이 다르게 보였다.
그 사실이 서연에게 가장 부끄러웠다.
10부 — 사과
준호가 다시 바깥으로 나왔을 때 서연은 아직 있었다.
관리자는 다른 업무로 돌아갔고, 준호의 아버지는 누군가와 잠시 더 이야기하고 있었다.
준호는 차 쪽으로 걸어왔다.
서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저기요.”
준호가 멈췄다.
“네.”
서연은 친구들을 한 번 바라봤다.
그들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아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준호는 조용히 기다렸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분명했다.
준호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서연은 계속 말했다.
“제가 옷만 보고 마음대로 판단했어요.”
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연은 더 솔직해졌다.
“사실 차가 진짜 당신 거라서 미안한 게 아니에요.”
준호가 그녀를 바라봤다.
“만약 당신 차가 아니었어도 제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됐던 것 같아요.”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연은 당황했다.
“그게 끝이에요?”
준호가 조금 웃었다.
“뭘 더 해야 해요?”
“아니…”
서연도 작은 웃음이 나왔다.
“저한테 화 안 났어요?”
“조금 당황했어요.”
“그게 다예요?”
준호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친구분이 웃었을 때는 좀 창피했어요.”
서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준호는 바로 덧붙였다.
“아니, 괜찮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서연이 그를 봤다.
“사과하셨으니까 됐다는 뜻이에요.”
서연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
11부 — 차보다 더 어려운 것
서연은 잠시 검은 세단을 바라봤다.
“자동차 좋아하세요?”
준호가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네?”
“계속 차 보고 계셔서.”
서연이 웃었다.
“사실 별로 몰라요.”
“그럼 왜 여기 왔어요?”
“친구가 보자고 해서요.”
친구들이 뒤에서 눈을 피했다.
준호도 웃었다.
“저는 좋아해요.”
“그래 보여요.”
서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준호는 기다렸다.
“왜 그렇게 입고 다녀요?”
말이 나오는 순간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아.”
준호가 웃었다.
“또 시작인가요?”
“아니, 아니요.”
서연이 손을 저었다.
“진짜 그냥 궁금해서.”
준호는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봤다.
“이거 편해요.”
“그게 이유예요?”
“네.”
“끝?”
“그리고 오래 입어서 몸에 익었어요.”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짜 이상하다.”
“뭐가요?”
“이런 차 타면서 옷은…”
그녀가 말을 멈췄다.
준호가 대신 말했다.
“싼 거?”
서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네.”
준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옷이 차보다 훨씬 어려워요.”
“왜요?”
“차는 성능 보면 되잖아요.”
“옷은?”
“뭐가 좋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친구들도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누군가를 낮춰 보는 웃음이 아니었다.
서연은 그 차이를 느꼈다.
12부 — 그날 이후
서연은 그날 일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준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잠깐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가 힘들 때 도와줬고, 길에서 누군가 물건을 떨어뜨리면 주워 줬다.
직원에게 소리 지르는 사람을 싫어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불쾌해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외모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 순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있을 때 그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근데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래?”
누군가 물었다.
서연이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
“아버지는?”
“몰라.”
“그럼 진짜 부자인지도 모르네.”
서연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게 중요한가?”
친구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서연은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며칠 전의 자신이라면 가장 먼저 궁금해했을 것이다.
누구 집 아들인지.
어떤 회사인지.
얼마나 부자인지.
하지만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검은 세단이 그의 것이었다는 것보다, 자신이 그 차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과 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됐던 것이 더 기억에 남았다.
서연은 말했다.
“내가 미안했던 이유가 그 사람이 부자여서라면, 그건 더 이상하잖아.”
친구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13부 — 준호가 기억한 것
준호 역시 그날 일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는 조금 달랐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배경이 사람들의 태도를 얼마나 빨리 바꿀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차가 반응하기 전.
서연은 그를 불편한 사람처럼 봤다.
차가 반응한 후.
그녀는 의심했다.
관리자가 이름을 부른 후.
그녀는 말을 잃었다.
준호는 그것이 조금 무서웠다.
사람 한 명은 그대로인데, 주변의 태도는 정보 하나로 바뀌었다.
며칠 뒤, 준호는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아빠.”
“응?”
“사람들이 원래 다 그래?”
“뭐가?”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면 태도가 달라지는 거.”
아버지는 잠시 생각했다.
“많이 그렇지.”
“왜?”
“사람은 정보를 가지고 판단하니까.”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아니.”
아버지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판단하는 것과 함부로 대하는 건 다른 문제야.”
준호는 듣고 있었다.
“누군가를 잘 모를 수는 있어.”
“네.”
“근데 잘 모른다는 이유로 무시할 필요는 없지.”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든, 그 사람이 네게 뭘 줄 수 있는지 알기 전에 먼저 제대로 대하면 된다.”
“그게 어렵겠죠?”
“생각보다.”
아버지는 웃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실패하는 거고.”
14부 — 다시 만난 두 사람
몇 달 뒤.
준호는 우연히 서연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자동차 전시장이 아니었다.
서울의 한 작은 전시회였다.
준호는 친구와 함께 사진전을 보고 있었고, 서연은 대학 동기들과 와 있었다.
서연이 먼저 알아봤다.
“한준호 씨?”
준호가 돌아봤다.
잠깐 기억을 더듬다가 웃었다.
“아.”
“기억나요?”
“네.”
서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옷 보고 기억한 건 아니죠?”
준호가 자신의 셔츠를 봤다.
이번에도 평범했다.
“이 옷은 그날보다 새 거예요.”
서연이 웃었다.
둘은 잠깐 전시장을 함께 걸었다.
서연이 물었다.
“그 차 잘 타고 다녀요?”
“네.”
“아직도 사람들이 못 믿어요?”
준호는 웃었다.
“가끔요.”
“짜증 안 나요?”
“처음보다는 덜요.”
잠시 후 서연이 말했다.
“그날 이후로 저 좀 바뀌었어요.”
준호가 그녀를 봤다.
“어떻게요?”
“사람 볼 때 한 번 더 생각해요.”
“좋네요.”
“그게 다예요?”
“제가 상 줘야 해요?”
서연이 웃었다.
“아니요.”
둘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전시장 벽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시장 상인.
버스 기사.
교복 입은 학생.
새벽 청소 노동자.
정장을 입은 회사원.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이었다.
서연이 말했다.
“사람 얼굴만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사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당연한 건데.”
준호가 대답했다.
“네.”
“근데 왜 우리는 자꾸 안다고 생각할까요?”
준호는 한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빨리 판단하는 게 편해서 아닐까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15부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검은 세단은 몇 년 뒤에도 준호가 타고 다녔다.
새 차가 나왔다.
더 비싼 모델도 나왔다.
친구들은 바꾸라고 했다.
하지만 준호는 계속 그 차를 탔다.
그날의 일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차가 마음에 들었다.
다만 가끔 전시장에 처음 서 있던 자신을 떠올렸다.
낡은 셔츠.
오래된 운동화.
차를 조심스럽게 만지던 손.
그리고 뒤에서 들려온 말.
“당신이 살 수 있는 차도 아니잖아요.”
시간이 지나자 그 말은 더 이상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질문처럼 남았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 결정되는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알기 전인가.
알고 난 후인가.
만약 상대가 부자라고 알아야 친절해진다면 그것은 친절일까.
상대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알아야 존중한다면 그것은 존중일까.
준호는 그 질문에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사람이 가진 것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다.
돈도.
관계도.
상처도.
능력도.
가족도.
살아온 시간도.
그리고 어떤 사람의 진짜 가치도.
전시장에서 보였던 것은 준호의 낡은 옷뿐이었다.
서연은 그것만 보고 결론을 내렸다.
몇 초 뒤 은색 차 키가 나타났다.
검은 세단의 불빛이 한 번 깜빡였다.
관리자가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모든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 아니었다.
차가 준호의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비공개 회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보다 전이었다.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던 순간.
준호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던 순간.
그때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준호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평범한 옷을 입고 나타날 때.
조금 어색해 보일 때.
그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보일 때.
그는 먼저 생각했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굳이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차 키를 볼 필요도 없었다.
직함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누구의 아들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으로 대하면 됐다.
그날 서울의 고급 자동차 전시장에서는 아무도 쫓겨나지 않았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망신당하지 않았다.
관리자는 서연을 꾸짖지 않았다.
준호도 그녀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검은 세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바뀐 것은 오직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그날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준호가 떠나기 직전, 서연은 마지막으로 검은 세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청년을 보았다.
낡은 옷.
오래된 운동화.
은색 차 키.
몇 분 전까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준호와 그 차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과 현실이었다.
준호는 차 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서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준호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서연이 말했다.
“조심히 가세요.”
준호가 작게 웃었다.
“네.”
그리고 차 문을 열었다.
그 순간에도 그는 누군가를 이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스물한 살 청년처럼 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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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아무도 그렇게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끝